반핵아시아포럼의 30년

핵무기도 핵발전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아시아 사람들이 손을 맞잡고 활동하는 네트워크로 반핵아시아포럼이 결성된 지 올해 30년을 맞이합니다. 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서로를 존중하고 격려해 온 역사를 되돌아봅니다. (NNAFJ 사무국) *번역: 오하라 츠나키

1993 NNAF 1st 일본

1990년대 초 일본 핵산업은 국내 핵발전 신규 건설이 한계에 부딪치자, 아시아 각국에 핵발전소를 수출하려 했다. 아시아 각국에서 핵발전 추진 분위기가 조성되도록 일본 원자력 산업 회의가 주도한 ‘아시아 지역 원자력 협력 국제 회의’도 매년 개최되었다.

이런 가운데 한국 활동가가 ‘핵발전 추진파가 국제 교류를 활발히 하고 있다면 우리들 반대파도 국제 연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93년 6월 26일 ~ 7월 4일 제1차 반핵아시아포럼이 일본에서 개최되었다. 8개국 30명이 참가해 7개 코스로 나뉘어 핵발전소 현지 및 주변 도시 총 28곳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후 포럼은 거의 매년 각국을 돌며 개최되어 왔다. 도시지역에서 국제회의를 실시할 뿐만 아니라, 핵발전소 소재지와 건설 예정지에서 지역 주민들을 만나는 것을 소중히 해 왔다.

핵발전소 소재지와 건설 예정지에서 열리는 집회와 교류회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반핵아시아포럼에 참여했다. 참가자들은 정보교환, 경험공유, 공동행동을 펼쳤고 서로 배우고 격려했다.

1994 NNAF 2nd 한국

한국에서는 1987년 대투쟁 이후 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반핵 운동이 시작됐다. 제2회 반핵아시아포럼에 일본에서 36명 참가했다. 영광핵발전소, 고리핵발전소, 울진핵발전소에서 어민과 농민들과 함께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또 핵폐기물 처분장 건설 저지에 성공한 고성과 청하에서도 집회를 열었다. 힘찬 실력투쟁을 벌여온 각지 주민들과 연일 만났다.

반핵아시아포럼 직후 한국 지역단체와 시민단체는 네트워크 조직으로 ‘핵없는 사회를 위한 전국반핵운동본부’를 결성했다.

1995 NNAF 3rd 대만

대만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계엄령이 1987년 해제된 후 제4핵발전소 반대운동이 민주화 투쟁의 큰 축이 되었다. 제1핵발전소부터 제3핵발전소까지 총 6기는 계엄령 하에서 건설되었고 운전이 강행되었다. 하지만 독재와 부정부패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제4핵발전소 건설 계획에 대해 사람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제3차 반핵아시아포럼에서는 타이베이에서 3만 명이 시위에 결집했다.

포럼 참가자들은 제1, 제2핵발전소, 방사능 오염 아파트, 방사능 오염 도로, 타오위안 방사능오염지역, 란유섬을 방문했다. 또한 제4핵발전소 부지 내에서 시위를 벌였고, 마지막에 공라오(貢寮) 주민과의 교류집회를 하면서 포럼 막을 내렸다.

1996 NNAF 4th 인도네시아

1990년대 수하르토 군사독재정권은 자바 섬 중부 무리아에서 핵발전소 건설을 계획했다. 일본 간사이전력 자회사가 사전 조사를 실시한 사실이 보도되자 일본에서 반대 여론이 터져 나왔고 원전 수출 반대 캠페인이 벌어졌다.

일본에서 1993년부터 97년까지 약 15만 명의 서명을 받았고, 인도네시아에서 핵발전소 반대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일본으로 초청해 매년 집회를 개최했다. 일본 활동가들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핵발전의 위험성을 알리기도 했다.

군사독재 정권 하에 있던 인도네시아에서 핵발전소 반대 운동은 바로 민주화운동이었다.

1996년 반핵아시아포럼에서는 그 동안 반핵 운동의 중심이었던 자바 섬은 물론 수마트라, 롬복, 칼리만탄, 술라웨시 등 섬 주민들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고 반핵 전국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핵발전소 반대 여론이 높아졌고 경제위기도 맞물려 1997년 핵발전소 건설 연기가 발표되었다. 98년에는 30년 넘게 군림했던 수하르토 독재정권이 민중 투쟁의 승리로 막을 내리자 무리아 핵발전소 건설 계획도 백지화되었다.

1997 NNAF 5th 필리핀

필리핀에는 마르코스 대통령의 군사 독재 하에서 미국 웨스팅하우스사가 건설한 바탄 핵발전소가 있다. 바탄 핵발전소는 마르코스 정권의 부패와 유착과 비리, 인간 어리석음의 상징이었다. 이 결함투성이 바탄 핵발전소 가동에 반대해 1985년 6월 바탄에서는 시민 5만 명이 거리로 나와 총파업을 강행했고 민중들이 군사 탄압에 맞섰다. 그 격렬한 싸움이 86년 2월 피플 파워혁명으로 이어져 마르코스 군사독재 정권을 타도했다. 완공됐던 바탄 핵발전소는 아키노 정권 출범 직후 동결되었고 가동에 이르지 않았다.

그러나 필리핀 정부는 1992년 이후 다시 바탄 핵발전소 재개를 계획했다. 97년 반핵아시아포럼에서는 해외 참가자들이 버스를 타고 바탄 현지에 오후 11시 반을 넘어 도착했는데도 많은 지역 주민들이 나와 숙소 앞에서 참가자들을 박수로 맞이해주었다.

다음날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약 2000명이 핵발전소 건설 반대 시위를 했다. 바탄 민중들의 열정은 포럼 참가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1998 NNAF 6th 태국

태국에는 핵발전소는 없지만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핵발전소 도입이 모색되는 분위기 기운데 상업로와 연구로 건설 계획이 부상했다. 위기를 느낀 태국 사람들이 반핵아시아포럼 개최지로 손을 들어주었고 태국에서 포럼을 열게 되었다. 방콕에서 이틀에 걸쳐 심포지엄을 연 후 참가자들은 버스로 600km를 이동해 남부 춘퐁에 도착, 핵발전소 건설 예정지에서 200명의 주민들과 집회를 열었다. 이것이 춘퐁에서 처음으로 여는 반핵 주민집회였다.

2000년 온카락 연구로 건설 반대 주민 투쟁이 시작했다. 약 700명의 온카락 주민들이 수십 대의 버스로 상경해 정부를 향해 건설 계획 중단을 요구했고 계획은 중단되었다.

1회부터 태국 활동가들은 반핵아시아포럼에 참여했고, 젊은 활동가들은 온카락에서 건설이 계획된 연구로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온카락 사람들과 내용을 공유했다. 온카락 사람들은 98년 반핵아시아포럼에도 참가했다. 포럼이 온카락 사람들을 격려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다.

1999 NNAF 7th 인도

인도에서 2번째 핵실험(1998년)을 했던 이듬해 반핵아시아포럼을 인도에서 개최했다. 핵무기도 핵발전도 없는 아시아라는 구호가 가진 다면성과 그 무게를 담은 포럼이었다.

포럼에는 방사능으로 인한 건강 피해가 큰 자두고다 우라늄 광산 주민들도 참석했다. 파키스탄과의 관계, 중동 핵문제 등도 논의 주제로 등장했다.

카이가 핵발전소 현장 답사에서는 냉각수를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댐으로 마을 절반이 침수된 현장을 찾아갔다. 물에 잠겨가는 마을에서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주민들, 강제 퇴거를 당한 주민들과 의견을 교환했다. 국가권력의 막강함과 무자비함에 충격을 받는 동시에 그래도 일어서는 무수한 인도 사람들의 용기에 각국 참가자들은 용기를 얻었다.

2000 NNAF 8th 일본

도카이무라와 후쿠시마에서 포럼을 연 뒤 가시와자키시를 찾았다. 카시와자키가리와 6·7호와 같은 노형인 ABWR이 대만 제4핵발전소에서 건설되는 상황에서 대만에서 온 참가자들은 절실한 호소를 보냈다.

이에 앞서 1996년 대만 제4핵발전소 입찰이 실시되어 미국 GE사가 낙찰했다. 히타치와 도시바가 원자로를, 미쓰비시중공업이 터빈을 제조하게 되었다.

이후 대만에 핵발전소를 수출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일본과 대만 사이를 실로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일본에서는 서명운동, 불매운동, 집회, 국회질문, 도시바 주주총회 참석, 정부와의 협상 등을 벌였지만 힘이 부족했다.

제4핵발전소는 99년 착공되어 2003년과 2004년에 걸쳐 결국 원자로를 수출했다.

2001 NNAF 9th 한국

영광 핵발전소 현지에서 ‘문화광장’이 열려 노래와 판소리, 사물놀이 등 참가자도 함께 주민들과 둥글게 춤을 추었다.

증설 계획이 있는 월성핵발전소 앞에서는 약 800명이 참가하는 집회가 열렸다. 울산에서도 신고리 핵발전소 건설에 반대하며 강력한 집회와 시위가 열려 약 500명이 참가했다.

2002 NNAF 10th 대만

이미 착공된 제4핵발전소 찬반을 묻는 공민투표(국민투표)를 요구하는 집회와 시위를 열었다. 대만 총리와의 면담도 이뤄졌다.

대만 원주민 타오족이 사는 란유 섬도 방문했다. 랑유도에서는 계엄령 하에 생선 통조림 공장을 만들겠다는 거짓 약속으로 건설이 시작된 핵폐기물 처분장이 있고, 도민들의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미 드럼통 10만 개가 반입되었다. 1996년에는 핵폐기물을 실은 수송선 입항 저지 실력투쟁이 벌어져 핵폐기물의 섬 밖 반출이 약속되었지만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2003 핵폐기물 국제포럼, 부안

한국 부안에서는 2003년 핵폐기물 처분장 건설에 반대해 약 1000~2000명의 군민들이 매일 밤 도로에 모여 촛불집회를 200일 동안 계속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계속했다. 군민 한명 한명이 주인공인 투쟁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핵폐기물 국제포럼이 개최되었다. ‘부안선언’에는 고향 사랑과 강한 각오가 담겨졌고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었다. 2004년 2월 부안군민은 핵폐기물 처분장 건설 여부를 묻는 자주 주민투표를 성공시켜 승리했다.

2005 NNAF 11th 대만

대만에서 개최된 11회 포럼에서는 일본이 원자로를 수출해 건설이 추진되고 있는 제4핵발전소 반대 운동이 벌어졌다. 공사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지만 아무도 포기하지 않았다.

제4핵발전소 현지인 공라오(貢寮) 사람들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안녕 공라오’가 상영되었다. 현지인들이 걸어온 고난의 역사를 담은 이 영화는 이후 대만과 일본에서 널리 상영되었다.

2007 인도네시아 무리아 핵발전소 계획 백지화

수하르토 퇴진과 함께 무기한 연기된 무리아 핵발전소 건설 계획이 다시 부상한 것에 반대해 2007년 8월 31일 밤 무리아 핵발전소 예정지인 바론 마을 주민 약 6000명이 35km를 걷는 도보 행진을 벌였다.

다음날 전국 규모의 이슬람 단체인 NU 중부 자바 지부 성직자 약 100명은 무리아 핵발전소를 하람(haram) 즉 이슬람에서 금지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결국 부활한 핵발전 건설 계획을 무산되었다.

2008 NNAF 12th 일본

2007년 니가타현 주에쓰 앞바다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가시와자키가리와 핵발전소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1~7기 모두가 가동을 멈추었고 장기간에 걸쳐 정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따라 2008년 일본에서 열린 반핵아시아포럼에서는 지진과 핵발전소의 위험성에 대해 인식을 공유하고 집회와 시위를 통해 시민에게 호소했다.

2009 필리핀 바탄 핵발전소 재추진 백지화

필리핀 국회에서 바탄 핵발전소 재추진을 위한 법안이 제출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탄 핵발전소 건설 반대 네트워크(No to BNPP)를 결성해 반격에 나섰다.

바탄 핵발전소는 일부 정치인에게 거액의 이익을 안겨줬지만 일반 국민에게 가혹한 채무가 짊어졌고 부실공사 등 결함투성이이었다. 민중들은 즉각 필리핀 곳곳에서 항의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바탄 핵발전소 건설 재추진 움직임은 다시 민중의 투쟁으로 백지화되었다.

2010 NNAF 13th 대만

포럼에서는 제4 핵발전소 부근에 있는 활성단층에 대해 처음으로 지적해 지진과 핵발전의 위험성을 호소했다. 입법원(국회)에서 공청회를 열고 제4핵발전소의 내진성이 극히 취약하다는 점과 지질에 대한 재조사 필요성을 호소했다.

일본에서는 각지에서 지진이 활동기에 접어들면서 지진으로 인한 핵발전소 영향에 대해 다양한 대책이 강구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다음 해 일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 때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2011 NNAF 14th 일본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했다. 핵발전소에서 연이어 수소폭발이 일어나면서 거센 연기가 피어오르는 영상을 전 세계 사람들이 목격했다. 그해 여름 반핵아시아포럼은 일본에서 개최되었다. 후쿠시마에서 약 2000명이 참여하는 시위에 참가했고 도쿄전력 본사에서 열린 항의행동에 참가했다. 그 외에도 이와이시마에서 교류집회, 히로시마에서 원수금대회 등에 참여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아시아 각국에서 반핵운동이 급격히 확대했다. 태국에서는 3월 핵발전소 건설 후보지였던 여러 곳에서 주민 시위가 벌어져 핵발전소 반대 민중 네트워크를 결성했다. 대만에서는 대규모 제4핵발전소 반대 운동이 부활했다. 인도에서는 8월부터 코단쿨람(koodankulam) 핵발전소 가동을 막기 위한 비폭력 주민투쟁이 연일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핵발전소 사고가 현실에서 일어나는 것을 후쿠시마 사고를 보고 모두가 인식한 것이었다. 후쿠시마 사고는 아시아 사람들에게 자신의 고향이 핵발전소로 사라질지 모른다는 최대 위기감을 갖고 반대운동에 임하게 될 계기가 되었다.

핵발전소 건설 계획이 있는 베트남에서도 2012년 핵발전소 건설 반대 서명운동을 벌였다.

2012 NNAF 15th 한국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충격이 아직 깊이 남아 있는 그해 한국에서 열린 반핵아시아포럼에서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핵발전소 신규 건설 예정지로 지목된 삼척과 영덕에서 집회와 시위가 벌어졌다. 집회에서는 후쿠시마에서 참가한 고 하세가와 겐이치(長谷川健一)씨의 생생한 연설에 현지인들이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시위에는 가톨릭 신부 등 많은 종교인들도 참여했고 길가에서 작게 손을 흔들어 주는 주민들의 모습도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Oq1J9eXk54 (3분영화)

이 두 곳의 핵발전소 건설 계획은 2014년과 2015년 주민투표에서 반대파가 각각 승리하면서 2018년 건설 계획은 공식 백지화되었다.

2012 인도 쿠단쿨람 핵발전소 가동 반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를 계기로 인도 각지에서 핵발전소 건설 반대운동이 확산되었다. 그 중에서 쿠단쿨람에서의 싸움은 역사적인 주민 투쟁으로 발전했다.

2012년 9월 9일, 약 3만 명의 주민들이 건설 중인 쿠단쿨람 핵발전소를 포위하고 항의했다. 그러나 바닷가에서 하룻밤을 지낸 다음 날 10일 완전무장한 경찰대가 주민을 탄압해 많은 사상자와 체포자가 발생했다.

장기간에 걸친 비폭력 대규모 주민투쟁이었다. 약 8000명이 국가 반역죄로 피소됐다. 쿠단쿨람 핵발전소는 운전에 이르고 말았지만, 그 투쟁은 인도 각지에 계승되었다.

2014 NNAF 16th 대만

대만에서는 2011~13년에 걸쳐서 제4핵발전소 반대하는 10~20명 규모의 집회가 연일 열렸다. 2014년 4월 27일, 5만 명의 시위대가 타이베이역 앞 8차선 도로를 15시간 점거하였다.

대만 정부는 2기 모두 거의 완성된 상태였던 제4핵발전소 건설을 동결할 것을 발표했다.

그 해 반핵아시아포럼은 9월 대만에서 개최되었다.

2015 터키 시놉 핵발전소 반대 투쟁

4월 25일 터키 시놉에서 약 4만 명의 시민들이 집회를 벌여 ‘일본은 시놉에 핵발전소를 수출하지 말라’고 외쳤다. 2013년부터 미쓰비시중공업과 플라마톰이 시놉에 4기의 가압수형 원자로를 건설하려 했지만 흑해 연안 항구도시 시놉 사람들은 이에 대해 거세게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후쿠시마 사고가 가져온 충격이 컸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로 겪은 공포의 기억이 지금도 시놉 사람들의 기억에 뚜렷이 새겨져 있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시놉 사람들은 일관되게 반대 의사를 관철했고 계획은 2018년 백지화되었다.

2016 NNAF 17th 일본

17차 반핵아시아포럼은 일본에서 열렸다. 후쿠시마를 방문해 현지인들 이야기를 경청했고 도쿄에서 35,000명이 모인 핵발전소 반대 집회에 참가했다.

2016 베트남 핵발전소 건설 계획 중단

2018 NNAF 18th 필리핀

바탄 핵발전소 재개를 호시탐탐 노리는 정치인들의 움직임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필리핀에서 반핵아시아포럼이 열렸다. 마닐라에서 국제회의를 진행한 후 바탄에서 주민들과 집회를 열었다. 바탄 핵발전소 정문 앞에서의 항의 액션을 벌였고, 어선을 타고 바다 쪽에서 핵발전소를 보기도 했다.

‘반핵아시아포럼은 도시 활동가들의 교류뿐만 아니라 현지주민들을 소중히 여기는 네트워크입니다. 포럼을 통해 현지주민들이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태국에서도 필리핀에서도 핵발전을 저지하고 있는데 포럼이 해온 역할은 매우 큽니다’ Corazon Fabros(필리핀)

2019 NNAF 19th 대만

탈원전을 내거는 대만에서 열린 2019년 반핵아시아포럼은 <친정부 행사>가 되었다. 경제부와 환경보호처가 포럼 협찬단체가 된 것이다. 그동안 포럼은 항상 <반정부 행사> 이었기에 조금 익숙하지 않았지만, 천젠인 부통령이 해외 참석자 30여 명에게 “오랜 탈핵 운동에 감사한다.대만 정부는 탈원전 정책을 견지하겠다” 고 인사해 매우 깊은 감회를 받았다.

21년 12월 18일 「제4 핵발전소 가동 여부를 묻는 공민 투표(국민 투표)」가 실시되어 426만 명이 가동 반대표를 던졌다 (찬성은 380만).

대만은 핵발전소 수명 연장을 하지 않았고 이미 4기는 폐지되어 2025년 5월에는 핵발전 제로를 달성할 전망이다.

2020~ 방사능 오염수 해양투기 반대

후쿠시마 제1 핵발전소에서 저장 중인 오염수의 해양 투기 방침을 철회하고 육상 보관할 것을 요구하는 국제 서명이 2020년 4월부터 시작해(28,627명 서명) 일본, 한국, 대만, 필리핀, 호주 등에서 반대 운동을 벌였다.

2021년 1월 20일과 2월 9일에는 한일 참가자(각 150명, 200명)가 온라인 줌을 통해 집회에 참여했고 국제 서명을 제안하고 311개 단체(24개국)가 촉구하는 인터넷 국제 서명이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현재 110개국 87,000명이 서명했다. キャンペーン ·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10주년, 오염수 해양방출 반대! 핵발전소 이제 그만! 국제서명 · Change.org

15개국에서 집회, 스탠딩, 일본대사관 항의 등을 반복했다.

’방사능의가해자가되고싶지않다’

1992년부터 2018년까지 인도네시아, 대만, 베트남, 인도, 터키에서 핵발전소 수출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했다. 서명 운동, 미쓰비시·히타치·도시바의 제품불매운동, 국회에서 질문, 정부와 교섭을 진행하기도 했고, 대상국에서 활동가를 불러서 집회를 열기도 했고 대상국을 방문해서 집회를 열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베트남, 인도, 터키에 대한 수출계획은 백지화되었다.

대만 제4핵발전소에는 원자로를 수출해 버렸지만, 대만 민중이 가동을 막았다.

2023 NNAF 20th 한국

2023년 제20회 반핵아시아포럼은 한국에서 개최될 예정입니다. 핵발전소가 있는 지역을 직접 방문하면서 지역 주민들과 교류하는 기존의 포럼 방식으로 4년 만에 각국 활동가들이 숙식을 함께 하며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독일과 대만은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교훈 삼아 운동을 확대해 탈핵을 실현했습니다. 우리도 뒤를 따르며 조금이라도 빨리 탈핵을 이루어냅시다.